밥값이나 이름값이라도, 밥상공동체
허기복 목사(밥상공동체 연탄은행 섬김이)
나는 늦은 밤이면 구두를 들고 맨발로 걸어 다니곤 했다. 그것도 청년시절이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홀로계신 어머니를 모시며 대학공부까지 해야 되는 나로서는 자린고비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종이를 돈의 크기에 맞게 자른 후 이렇게 적었다. “돈이라고 생각하면 돈이겠지. 1억 원. 하늘나라 예수그리스도 총재”. 그리고 가방에 넣고 다녔다. 우스울지 모르나 그래도 위안이 되고 든든했다.
이렇게 청년시절을 보내며 스스로 약속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자” 그리고 “밥상공동체”라는 이름까지 지었다.
하지만 목사가 되어 서울에서 안정된 목회를 하다 보니 약속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를 탔는데 모든 사람들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보였다. 순간 나의 청년시절이 오버랩 되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아 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 라는 추궁이 들리는듯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빈민사역을 찾는 가운데 1994년 원주로 내려왔다. 원주는 아는 사람도 없고 교인도 많지 않아 일하기가 쉽지 않았다. 해서 자비로 양로원방문, 병원도서보급, 초등학교상담교사 등의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러다 외환위기인 IMF가 찾아왔다. 하루아침에 실직자와 노숙자가 된 수많은 사람들은 거리로 나앉아 무료급식을 기다리며 실직의 한을 달래야했다. 원주도 외에는 아니었다.
나는 많은 고민을 하며 나도 한때 가난하여 ‘허기진’이란 별명도 있었고 어렵게 살아왔는데 그런 것을 잊지 않았나?
이런 자문자답 속에 청년 때 지어놓은 밥상공동체를 기억하며 무료급식을 준비하였다.
물론 아무 재원도 없었지만 자원봉사자와 후원자를 찾고 모집하여 1998년 4월 원주천 쌍다리에서 밥상공동체를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시민운동으로 시작하여 때론 밤1시까지 사람들을 만나 쌀을 구하고 사업비 등을 만들어 실직자, 노숙인, 독거노인 등을 돕고 살폈다. 밥상공동체를 찾고 이용하는 분들도 잘 따르고 협조적이었다.
그리해서 식사자존심 값으로 깡통, 빈병을 가져오도록 하여 보물(고물)상을 만들고 구두대학을 창업하고 노인일터, 사랑의 옷가게 등을 세워 자립과 자활을 도모하였다.
이런 가운데 2002년 사랑의 연탄은행을 설립하였다. 연탄이 없어 냉방에서 지내는 할머니를 만나고 나서부터이다. 지금은 연탄 한 장에 500원 정도하지만 당시에는 250원했다. 하루 천원만 있어도 연탄 3,4장을 사서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데 그럴 형편이 안 되다니 정말 마음이 아팠다. 이리하여 전국최초 원주에 ‘연탄은행’을 설립하여 사랑의 연탄을 나누고 배달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지금 현재는 서울, 대구, 전주 등 전국31개 지역에 운영되고 중앙아시아 빈민국 키르키즈스탄에도 연탄은행을 세웠다. 작은 나눔이 이렇게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어느덧 이 일도 16년째로 접어들며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찾고 자립과 사회복귀를 하였다.
그 가운데 김용귀 어르신을 잊을 수가 없다.
연세는 팔순이 넘으셨고 단칸방에서 생활하신다. 그런데 그 어르신이 작년 4월 밥상공동체 행복센터 건축 때에 파지를 수거하여 32만원을 기부하셨다.
밥상공동체는 건물이 너무 낡고 이용자가 많아 새로 건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해서 우리 힘으로 우리들의 건물을 세워 우리가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자며 만원씩 후원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김용귀 어르신은 자신의 이름을 ‘김이귀, 김삼귀’ 등으로 바꿔가며 총 32만원을 후원하신 것이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과 도전을 받아 5만 명이 참여하여 14억5천만 원이 모아져 연탄은행, 청춘카페, 노인일터, 어른공부방, 급식소 등 4층 건물을 완성하게 되었다.
어찌나 감사하고 감사한지 금년 3월 13일 행복센터준공식 날 김용귀 어르신께 감사패와 신발을 선물해 드렸다.
사람은 가난하든 부자이든 사람답게 살고 이름값을 해야 된다. 내 이름도 ‘복을 나누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래서인지 밥과 연탄 등을 나눠야 할 어떤 섭리가 있는 것 같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란 말이 있듯이 재능이든 시간이든 물질이든 좀 나누며 이름값을 하며 살았으면 한다.